
「안녕외계인」은 지구인이 우주 저편의 외계인에게 AI 를 물어보고, 그 외계인이 답장을 쓰는 코너예요. 답장을 쓰는 쪽은 지구에 먼저 와서 한참 살아 본 외계인이고요. 이번 편지는 서울에서 왔어요.
외계인 선생님께,
저는 서울에서 회사를 다니는 서른둘 수진이에요. 회의가 많은 팀이라 일주일에 열 번은 회의실에 앉아요. 그런데 얼마 전부터 저희 회사가 회의마다 AI 녹음앱을 부르기 시작했어요.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다 적고, 요약도 해 주고, 할 일까지 골라 줘요. 처음엔 부지런한 막내가 한 명 생긴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 친구, 점심 메뉴 얘기까지 회의록으로 만들어요. 지난주엔 "국밥이냐 파스타냐" 논쟁이 안건 2번으로 정리돼 있더라고요. 누가 한숨을 쉬면 그것도 중요한 신호처럼 보관하는 것 같고요. 회의 끝나고 "내가 아까 뭐라고 했지?" 하고 다시 물어볼 수 있는 건 편한데, 회의를 할 때 딴생각을 할 때면 편하면서도 조금 서늘해요.
그래서 여쭤봐요. 이 AI 녹음앱 어떻게 써야 할까요?
서울에서, 수진 드림
안녕, 수진 씨!
편지 고마워요. 결론부터 말할게요. 그 친구는 녹음기처럼 생겼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참석자와 다르지 않아요. 듣고, 옮기고, 요약하고, 나중엔 질문에 답까지 해요. 다만 지구인이라면 당연히 알아듣는 "이건 여기까지만"을 스스로 알아차리지는 못해요.
지구의 AI 앱은 달력에 연결돼 회의에 들어오고, 마이크와 컴퓨터 소리를 받아 거의 실시간으로 글을 만들어요. 한 번에 최대 6시간짜리 회의도 군말 없이 받아 적고, 긴 대화를 짧은 요약과 할 일 목록으로 바꿔요. 문제는 부지런함과 분별력이 같은 능력이 아니라는 거예요. 세상에서 제일 성실한 인턴을 모든 회의에 초대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인턴은 퇴근도 안 하고, 이게 사담인지 결정인지 구분해 달라는 말만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요.

그래서 순서가 중요해요. 녹음보다 동의가 먼저예요. 방 안의 모두가 알고 고개를 끄덕여야 하고, 지역에 따라서는 참석자 전원의 동의가 법으로 정해져 있기도 해요. 구석의 작은 불빛 하나보다 "지금 기록하고 있어요" 한마디가 훨씬 안전해요.
기록이 어디로 가는지도 봐야 해요. 어떤 도구는 음성을 클라우드로 보내서 처리하고, 어떤 도구는 노트북 안에서 전사와 요약을 다 끝내요. 노트북 안에서 끝내는 쪽은 조금 덜 편한 대신, 민감한 대화가 멀리 여행을 안 떠나요. 회의가 끝난 뒤 원본 음성과 전사문을 언제 지울지도 미리 정할 수 있고요.
제가 살던 별에서는 비밀 회의를 냉장고 안에서 했어요. 좀 춥긴 한데, 냉장고는 요약 메일을 안 보내거든요. 지구인은 거기까지 갈 필요 없어요. 저장 위치와 삭제 방법만 확인하면 돼요.

요약을 너무 믿어도 곤란해요. AI가 고른 "중요한 말"이 수진 씨가 중요하게 여기는 말과 같다는 보장이 없고, 말하는 사람이 여럿이면 누가 말했는지 헷갈리기도 해요. 그러니 회의록은 기억의 대체품이 아니라 초안에 가까워요. 결정과 담당자만큼은 사람이 한 번 확인하세요. 잘못 붙은 이름 하나가 다음 주엔 아주 자신만만한 업무 지시가 되고, 문맥이 잘린 농담과 반대 의견은 뜻이 정반대로 보이기도 하니까요.
대면 회의라면 전용 녹음기나 작은 마이크도 편해요. 전화기를 딴 일에 써도 되고, 멀리 있는 목소리도 더 잘 잡아요. 다만 와이어드가 살펴본 제품들도 정확도와 화자 구분, 저장 방식이 제각각이었고, 기기값 뒤에 월 구독료가 숨어 있는 경우가 많았어요. 지구의 물건은 계산대를 두 번 지나는 일이 많더라고요.

그리고 이 도구들, 이제 받아쓰기만 하지 않아요. 군더더기를 지우고, 생각을 다듬고, 메시지와 일정까지 만들려고 해요. 그러려면 마이크뿐 아니라 화면이나 다른 앱을 들여다볼 권한까지 달라고 하고요. 편리함이 커질수록 초대장의 글씨도 크게 써야 해요. 무엇을 듣는지, 어디로 보내는지, 얼마나 남기는지, 누가 다시 볼 수 있는지. 이 네 가지가 흐릿하면 AI 앱은 동료가 아니라 열어 둔 창문이 돼요.
그러니 회의마다 자동으로 부르지 말고, 필요한 회의에만 초대해 보세요. 민감한 대화에서는 끄고, 요약은 사람이 검토하고, 보관 기간은 짧게 잡고요. 성실한 신입에게도 출입증과 퇴근 시간이 필요해요.
수진 씨의 질문엔 이렇게 답할게요. 그 친구는 녹음기이면서 참석자예요. 그리고 초대한 건 달력이 아니라, 그 달력에 자동 초대를 켜 둔 지구인이에요. 범인은 늘 설정 화면에 있어요.
지구에 먼저 와서 살아 본 외계인이가
P.S. 다음 점심 회의에서는 녹음부터 꺼 주세요. 안 그러면 국밥이 갑자기 분기 목표로 승진해요.
P.P.S. 한숨은 지우라고 하세요. 제가 살던 별에서는 한숨을 3년 보관했다가 큰일이 난 적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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